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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들

23주 나날들

1. 

블로그 나날들에 이전 내용을 쓰고 바로 다음날이었나 병원에 다녀왔었다. 

며칠간 설사가 계속 이어졌고, 울렁울렁거리고, 배뭉침이 잦아져서 배가 딱딱하니 아픈 횟수도 늘어났었다.

감기기가 오는지 머리도 아프니 몸이 이상스럽다 싶어서 정기검진날이 아닌데도 병원에 방문했다.

처음 해보는 태동검사. 배에 동그란 두개를 올려놓으니 뱃속 소리가 들렸다. 

라준이의 심장소리를 이렇게 긴 시간 듣고 있던 건 처음이었지. 대강 20여분 정도를 그러고 있었다.

사실 낭만적이진 않았다. 처음 라준이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땐 눈물이 왈칵 날정도로 감격스러웠는데 

이번엔 일단 내가 아팠고, 심장 소리 뿐만 아니라 뱃 속 소리가 들리다보니 계속 쿠쿵쿠쿵쿠쿵쿠쿵...!

기차 소리를 듣고있는 기분이었다. 배뭉침이 생겨 배가 딱딱해지면 아프고, 내가 쿨럭거리면 더 시끄러운 소리가...ㅋㅋㅋ



2. 

태동검사를 마치고서 한~참을 기다렸다 진료를 받았다. 원래 담당 선생님께서 오늘은 휴진이라고... 뚜둥...

다른 선생님께 진료를 받았는데 약간은 수다스러운 느낌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난 좋았음.

초음파 보는데, 우리 라준이 눈동자라고 보여주셨다. 조금 무섭기도 했음. 눈동자라닠ㅋㅋㅋㅋㅋㅋ생선같았닼ㅋㅋ

주수에 맞게 잘 크고있고, 머리는 주수에 비해 한주차 정도 작은 편이고, 다리길이는 4주차 정도 더 길었다. 우와!!

의사 선생님들은 왜이렇게 물어보지도 않은 우리 라준이 성별을 알려주고 싶으신건지 또 알려주셨다. 

그만해.. 알겠어... 우리 라준이 아들이야... 알아 알겠어 그만해ㅠㅠ


3. 

다만 걱정인 것은, 라준이가 좀 아래쪽에 위치해있고 그 작은 궁댕이로 자궁문을 누르고 있다고 한다. 

궁댕이가 아니라 머리로 막고 있다던가 좀 심해지면 조산기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고 했다. 심장이 덜컹...

진료 받느냐고 누워서 초음파 보는 그 순간에도 배는 뭉쳐서 딱딱해지고.. 

일다니느냐고 물으시길래 "아뇨 집에서 쉬는데요.." 라고 민망하게 대답했더니만

집안일도 하지말고 누워만 있으랜다. 뭐 집안일을 한 것도 없다. 나는 밥 차리고 설거지 하는 정도?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다 돌아가면 빨래 널고, 널려있던 빨래 개고, 셔츠 몇벌 다림질 하는 정도인데 말이다.

방청소도 오빠가 하고, 난 사실 정말 너무 널널한 가정주부인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니.. 너무 민망했다.

몸을 좀 풀어줘야 하니 수액 맞고 가래서 그 정도는 아닌데 싶었지만 맞고 왔다. 

   



4. 

꼼짝없이 누워만 있으라는 의사선생님 말에 주말 내내 푹 쉬었다. 사실 쉬기만 하는데도 힘들었다.

배도 계속 아프고 몸도 무거워서 움직일 때 마다 낑낑.. 한번씩은 표정관리도 안되고 눈물이 날 것 같을 때도 있었다.

남들은 임신 후에도 직장도 다니고 놀러도 다니고 할 거 다 한다는데 나는 나이도 어리면서 왜 이러나 싶었다.

괜히 엄빠 보고싶고 우울우울 기운이 슬그머니 들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생각 없이 티비나 봤다.

주말내내 밥 차리는 것 부터 설거지며 청소며 빨래며 나는 꼼짝도 못하게 하고 오빠가 다 해줬다.

평일에 일하고 와서 주말엔 푹 쉬게 하고 싶었는데 나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주말까지 가사 노동을 하게 되어 미안했다.

내가 좀 움직여서 뭐 좀 하려고 하면 가만히 있으라고 혼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모습이 보이면 바로 제지 당했다.

이런 거 오래가지 않으니까 즐기라는 장난을 치며 정말 둘이서만 오롯이 보낸 주말.

오빠는 두부만두전골, 감자요리 등등 맛있는 밥상을 차려줬다. 나보다 더 잘하는 듯..

오빠 덕분에 요즘 태동이 안 느껴졌던 라준이 태동도 다시 느꼈다. 그게 무척 기쁘고 고마웠다.

이렇게 꼼짝도 안하고 밥 먹고 누워서 쉬기만 하다가는 출산 후에도 살이 안 빠지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도 되긴 한다.

이모 말로는 울 엄마가 딱 이러셨댄다. 나 가지셨을 때 엄마도 임신 하자마자 몸이 힘들어져서 일을 관두셨었다.

뱃 속에서 내가 안 예쁘게 있어서 엄마도 지금 나처럼 힘들고 아팠댄다. 아빠 말로는 병원도 엄청 다녔다구...

여자의 자궁은 어머니가 그대로 물려주시는 선물 같은 거라더니 정말 그런가보다. 어쩜 똑같은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엄마 체질인 나를 볼때마다 놀라곤 한다. 울엄마는 좀 허약체질이었는데.. 걱정도 되고...

나 때문에 주말을 푹 못쉰 게 오빠한테 너무 미안하다. 푹 쉬었다고 말해주지만 아무것도 안하고 쉴 수도 있었을텐데

내가 해야할 일까지 다 했으니 힘들었을 거다. "당연히 신랑이 해줘야지!" 하는 얘기들도 있고, 맞는 말이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 옆에서 뭐 더 필요한 건 없는지 뭐 해줄 건 없는지..

모든 신경을 다 내게 쓰면서 간병을 하는 건 마음만으로 되는 일이 아닌 건 확실하다.

심지어는 나는 그 아픈 와중에도 베스킨라빈스 사이즈업 이벤트는 꼭 먹어야겠다고 징징거려 버렸다.

한밤중에 오빠가 터미널까지 가서 아이스크림 포장을 해왔다... 미안해... 너무 맛있었오 >,<

주말 내내 나는 주방 근처로는 가지도 못했고, 쇼파와 침대 사이에서만 왔다 갔다... 완전 제대로 백수놀이ㅠㅠ

항상 싫은 표정 하나 없이 장난 쳐가며 나를 위해주는 우리 오빠가 너무너무너무너무 좋다. 


5. 

주말이 지나고 평일이 와서 오빤 출퇴근을 하고, 난 느즈막히 일어나서 아점을 챙겨먹는다.

정말 간단하게 밥이랑 계란 후라이랑 소세지랑 뭐 이런 식으로.. 주방에 오래 서있을 힘도 없다. 한끼 때우는 거지 뭐.

그러고서는 빨래 돌려야 하면 빨래를 돌리고, 개야 하면 빨래를 갠다. 그러다가 씻고 쇼파에 다시 눕는다.

최대한 서있지 않으려고 하고, 앉아서만 집안 일을 깨작깨작 건드리는데도 오빠는 하지 말라고 한다.

오빠가 집에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하게 하니까 오빠 없을때라도 사소한 집안 일을 하고 있다. 

그래도 잘 쉬고 있어서인지 주말만큼 아픈 것 같진 않다. 시도때도 없이 배가 뭉쳐서 윽윽 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잠들기 전과 자고 일어날 때가 특히 배뭉침이 심해져서 아픈데, 그땐 정말 울고싶다.

잠들기 전에 배뭉침에 배가 불편해져서 자려던 잠도 달아나는 나는 침대에서 버둥거리거나 바스락 거린다.

오빠는 얼른 일찍 자야 다음날 출근도 하는데 나때문에 오빠의 취침 시간이 늦어지는 게 좀 미안스럽다.

아침엔 잠, 그리고 배아픔 두가지와 싸워야 하는 게 어렵다. 요즘은 푹 자지도 못하니까 자는 시간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요상스럽고 혼란스럽고 시끄럽고 난장판 같은 요란스러운 꿈을 몇가지를 꾸는데 정신머리가 하나도 없다.

자고 일어나도 별로 개운하지도 않고, 자다가도 잘 깨고 뭐 그렇다보니.. 밤이 오는 게 별로 좋지가 않다.


6. 

오늘은 문득 이 집과 내 모습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창 밖은 꽤 시끄러운데 우리 집은 참으로 조용하다.

조용한 집에서 나는 혼자 밥도 먹고, 물도 마시고, 복숭아도 먹는다. 어딘가 가짜같은 느낌? 낯선 느낌?ㅋㅋㅋㅋㅋ

임신 중이라는데 배가 아프거나 라준이가 움직이지 않으면 임신인지도 잘 모르겠고.. 

주수에 비해 배도 별로 많이 안 나오는 편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나는 누구인가까지 갔을 수도 있었겠다.

해야할 일이 많다. 출산 계획도 세워야하고, 출산 준비물도 알아봐야 하고, 뜨개질로 모자도 떠야하고,

틈틈히 운동도 해야하고, 요리 실력도 늘어야 하고, 채무상담도 받아야 하고, 전입 신고도 해야하고... 엄청 많다.

마음에는 할일이 가득한데 막상 실제로 나는 많은 것들을 해내고 있진 않다. 늘 비슷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뿐.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 약간 뭐랄까. 의욕 상실? 비슷한 느낌인데.. 잘 모르겠다.

예전 내 사진을 가끔 들여다보는데, 참 예쁘다. "오오 미녀!" 이런 예쁨을 말하는 건 아니고...

생기있어 보이고, 밝아 보이고, 에너지 넘쳐 보이고, 반짝 반짝 빛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요즘의 나는 아니다.

요즘의 나는 둔하고, 침침하고, 답답하고, 느리고, 작다. 그게 싫다. 

이런 게 산전 우울증인가 싶은 생각도 오늘 문득 들긴 했지만 굳이 그렇게 그 단어 속에 나를 포함시키고 싶진 않다.

우울증이니 뭐니 이런 단어 말고, 그냥 이런 내 모습도 나니까. 그냥 요즘의 나는 그럴 뿐인 거다.

그런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거다. 그렇다고 나가서 움직이자니 그러고 싶지도 않다.

육아 지옥이다 뭐다 남들의 안 좋은 얘기들도 있지만 그래도 얼른 라준이를 만나고 싶다.

그럼 이런 조용한 순간의 고민들 보다는 라준이와 함께하는 왁자지껄함이 생길테니까. 

뭐 물론 그때는 그때가서 내가 너무 라준이 엄마로만 사나 뭐 이런 고민이 들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을거다. 그때의 나는 어떤 고민을 할지, 어떤 결정을 할지 지금은 모르니까.


7. 

거실에서 보이는 하늘이 참 맑다. 구름도 예쁘고, 하늘도 파란 것이 이제 정말 가을인가 싶다.

어느덧 결혼 한지 두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런 저런 일들도 있었고 손님들 집들이 하면서도 시간이 빨리 간 듯.

앞으로 3개월 반정도가 지나면 라준이를 만날 예정인데, 그때 까지 뭘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한다.

여행도 가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다. 난 왜이렇게 맨날 맛있는 걸 사먹고 싶은지 모르겠다.

내무부장관이 될 자격이 없는 듯. 만삭이 될 때 쯤엔 만삭 사진도 찍고 싶다. 결혼 웨딩 사진이 따로 없으니 이건 꼭!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삼개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지내게 될까. 어떤 모습으로 라준이를 만나게 될까 궁금하다.

가끔은 이렇게 오늘처럼 멍하기도 하고, 이유를 모르겠지만 기분이 안좋기도 하고, 우울모드에 빠지기도 하고..

또 한없이 즐거워서 꺄르륵 거리거나, 힘차게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고민하고 기대하고 걱정하고 뭐 내가 어떻게 하든간에 시간은 흐를거고, 우린 곧 만나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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