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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들

선선해진 9월 가을의 밤

1. 

한 주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나. 질염에 걸렸었다. 망할. 칸디다성 질염이라는데 엄청나게 간지럽고 따갑고 쓰라렸다.

밤에 잠들기가 어려울 정도로 괴로워서 참다 참다 병원에 갔더니 꽤 심한데 많이 아프셨겠다고 하더라. 내 마음을 딱 아네.

임신 초기에 질초음파 이후로는 쭉 복부 초음파를 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굴욕의자에 앉게 되었다. 오! 역시 기분이 좋지 않다!

원래 임산부들이 자주 걸리는 염증인데 좀 피곤하거나 힘들거나 그러면 걸리기 쉽다고 한다.

여성에게 질염은 마치 감기처럼 쉽게 걸리는 염증이라 뭐 부끄럽거나 그런 마음은 전혀 전혀 전혀 들지 않는다.

워낙에 질염이란게 공중화장실 변기에서도 옮을 수 있고, 목욕탕에서도 옮을 수 있고, 너무 흔하게 걸리기 쉽기 때문이다.

뭐 하여튼 질정과 연고를 처방 받아 와서 며칠 째 치료중인데 정말 이거 진짜 괴로운 일이다.

질정 넣는 기분은 정말 별로다. 으, 이상해 정말. 그래도 확실히 병원 가기 전 보다 많이 나아가는 기분. 

아마 이번주 내로 끝을 볼 것 같다. 일단 처방해준 질정도 하나밖에 안남았다. 이젠 연고나 자주 발라줘야지.


2. 

일요일에 시댁에 다녀왔다. 아버님 쉬시는 날이 일요일이라 하셔서 일요일로 갔는데 근무 중이셨다.

어머님께서 착각하셨다구.. 난 아버님도 참 좋은데 함께 식사 하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 

아버님 근무 중이신 곳으로 점심 도시락 가져다드리면서 잠깐이라도 얼굴 뵐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머님, 아주버님과 오빠랑 나랑 넷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 9시쯤 출발해서 도착하니 11시 반쯤이었다.

아주버님께서 터미널로 마중 나와주신 덕분에 시간이 더 단축되었다. 정말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더라.

도착하고서는 어머님 도와서 아버님 드실 점심 도시락과 우리 먹을 점심상을 차렸다. 

불고기, 돈가스, 고깃국 등등 어머님의 손길이 가득한 너무 과할 정도로 풍족스러운(?) 상차림이 되었다.

오빠랑 나랑 온다고 식재료 장보고, 아침 일찍부터 요리 준비 하셨을 어머님 생각하니 또 죄송스러웠다.

괜히 가서 어머님 고생만 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이 맛있는 식사를 아버님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속상함도 함께 들었다.


3.

내 몸은 정말 너무도 과하게 솔직한데 그 이유는, 조금만 체력보다 많이 움직인다 싶으면 바로 아프기 때문이다.

어머님 옆에서 보조한 거라 뭐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점심 식사 하는 도중에 배가 쿵쾅쿵쾅 아파서 괴로웠다.

태동도 아니고, 똥 마려운 배도 아니고, 뭐랄까 정말 표현할 수가 없지만 꽤 한참을 (더럽게) 아파왔다.

속으로 '라준아 이러지마. 라준아 엄마 배 안아프게 해줘. 밥 먹자, 밥!' 이라고 생각하면서

표정 관리 해가면서 열심히 밥을 먹었다. 한달정도를 거의 집밖으로 안다니고 다녀봤자 원주 안쪽이었는데

오랜만에 버스타고 2시간 넘게 있어서 그런가, 사실 어머님 댁에 가는 내내 멀미에 고통스러웠기도 했다.

굳이 외출한 마당에 오빠한테 "오빠 나 멀미나. 오빠 나 아파." 라고 하고 싶지도 않았고,

다 같이 기분좋게 점심 먹고 있는 그 와중에 "저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못 먹겠어요." 하고 싶지도 않았다.


4.

점심 먹고서 오빠랑 아주버님은 방에서 낮잠을 주무셨고, 나와 어머님 둘만의 시간이 되었다.

어머님께서는 소파에서 잠깐 쉬셨고, 나도 잠깐 앉아서 멍 때리고 있었다. 핸드폰도 할 게 없고 티비도 보기 싫고..

그냥 앉아서 비가 올듯말듯 어두컴컴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책이라도 가져올 걸. 난 지금 뭐하고 있는가. 굉장히 허무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스쳐갈 때쯤

어머님과 밖으로 나가서 어머님이 텃밭에 심으신 배추도 보고, 정원에 피어있는 오색찬란한 꽃들을 하나하나 구경하고,

또 다른 뒤쪽 텃밭에 가서 고추, 호박, 오이도 따고 방울 토마토도 구경하고 그러고 들어왔다.


5.

오빠랑 결혼하기 전에 어머님을 처음 뵙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진짜 많이 두근거리며 차에서 내렸는데 어머님께서 마당으로 나오셔서 나를 안아주시며 "잘 왔어요!" 라고 해주셨다.

그 날 하루종일 내 손을 잡고 앉아계셨다. 처음 뵙던 날 인상부터 어머님은 정말 따듯했다. 좋은 분이시구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어머니가 좋은 분이셔서 기분이 좋았다. 역시 그래서 멋진 사람이 되었구나 싶었다.

그 후에도 몇번 뵙고, 결혼 준비하면서도 뵙고, 또 결혼 이후에도 뵙고.. 

나만큼 좋은 어머님을 둔 며느리를 찾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머님은 정말 최고로 좋으신 분이지만

그래도 어머님은 어머님이라 어렵긴했다. 글세 왜 어려울까 스스로 고민을 많이 해봤었는데 사실 정확히는 모르겠다.

살면서 인터넷을 통해 시댁이라는 곳에 대한 글들을 보며 내게 어떤 작은 편견이 생겨있었을지도 모르고,

가족이 된 거지만 우리 엄마랑 다른 모습(?)에 낯선 것일지도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어머니이기에 어려울지도 모르고,

뭐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겠다 싶은거지 정확히 난 뭐뭐뭐 때문에 어려워! 라는 생각은 아니다.

어려운 거랑 불편한거랑은 다르다. 난 어머님이 불편하지 않다. 우린 다 다른 사람이고, 서로가 다를 뿐이니까.

뭐 하여튼 왜 구구절절히 처음 만난 날부터 이야기를 해댔냐면 점점 어머님이 더더더더더더더더 편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머님이랑 둘이 있는 시간이 그렇게 어렵고 힘들지 않았다. 워낙에 내가 애교부리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할까.


6.

산후 조리원에 대한 어머님 생각을 듣게 되었다. 산후 조리에 대한 걱정을 하고 계셨다.

조리원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셨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맞벌이로 돈 벌고 있는 것도 아닌데 2주에 200만원을

가까이 하는 금액을 쓴다는 게 참 마음이 계속 불편하다. 사실 지금 산후조리원 예약이 되어있는 상태다.

조금 더 고민해보고 조리원 자체를 취소하고 산후도우미로만 4주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뭐 하여튼 산후 조리 얘기부터 오빠 어릴 적 어머님 육아 얘기 등등 주로 어머님이 말씀하시고 나는 듣고있었지만

그 시간들이 싫거나 지루하거나 힘들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7.

저녁 식사로는 닭요리를 할 건데 뭘 해볼까 하셔서 같이 고민하다가 닭볶음탕으로 메뉴를 결정했다.

나는 이번에도 어머님 보조 역할로 도와드렸다. 어머님께서는 얼른 가서 앉아 쉬라고 계속 말씀 하셨는데

아침 일찍부터 혼자 이것 저것 준비하셨을 어머님 생각하면 쉬러 가고 싶지 않았다.

어머님 옆에서 양파도 썰고 괜히 이것 저것 여쭤보면서 보조를 하는 나를 어머님도 꽤 마음에 들어하신 것 같았다.

사실 하루종일 배가 아팠고 몸이 안좋았지만 내가 주방에 함께 있는 걸 좋아하시는 듯한 어머님 모습이 느껴져서

표정 관리 열심히 해가면서 이 악물고 어머님과 함께 했다. 이건 절대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다.

너무도 좋으신 우리 어머님, 내가 내 마음이 동해서 했을 뿐.

저녁 식사까지 진짜 너무 많이 먹었다. 먹을 게 너무 많았고 어머님은 이것도 먹어봐라 저것도 먹어봐라 주셨다.

정말 그러지 마시라고, 우리 버스타고 잘 가겠다고 했는데도 어머님과 아주버님은 강력하셨다.

이것저것 어머님이 주신 식재료 짐을 잔뜩 싣고 아주버님께서 우리를 원주까지 태워다 주셨다. 진짜 너무너무 감사했다.

그 몸상태로 버스까지 타려니 집을 나서기 한참 전부터 아찔했었는데, 승용차로 가면 그나마 훨훨훨 나을테니까.

좋지 않은 몸 상태로 너무 열심히 먹었는지, 아무리 편해졌어도 어렵긴 하다보니 긴장하고 있어서인지 속이 더 안 좋아졌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계속 가진 채로 집에 도착했고, 어머님이 주신 돈가스를 빵가루 묻혀서 냉동실에 넣고

다음날 출근해야하는 오빠 정장 바지 다림질 하고, 이것 저것 집안일 다 하고 나니 진짜 너무너무 피곤했다.


8.

힘들긴 힘들었구나 싶은게 자기 전에 또 토할 것 같고 신물 올라오듯 꺽꺽 대길래 먼저 잠들어서 잘 자고있는

오빠 깨워서 등 좀 두드려 달라고 해버렸다. 다음날 아침에도 아침식사 차려줘야지 싶었는데 눈도 겨우 뜬 데다가

눈만 겨우 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노무 몸은 정말 어찌 이리도 하찮은가. 조금 무리하면 바로 반응이 와버린다.

누가 뭐 엄청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아주 멀리 다녀온 것도 아닌데 어찌 이리 약한 건지. 

어깨도 아팠는데, 그래서인지 자면서 꿈을 꿨는데 지독했다. 내가 집에서 나오니 현관 문 앞에서 어떤 남자가 있었는데

마르고 퀭하니 못생긴 그 남자가 내 양쪽 팔뚝 가운데를 칼로 쓱쓱 그어버리는 꿈이었다.

그 남자는 어디가서 말하지 말라고 했고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알았다고 하고 나는 도망을 쳤다.

그러고 무슨 공중화장실 같은 곳에 들어가서 오빠한테 전화를 했나 문자를 했나 하여튼 오빠를 불렀다.

오빠가 몇시에 퇴근한다고 하길래 그 시간 맞춰서 시내 쪽으로 나갔다.

다른 직장 동료들과 함께 있었는데, 오빠만 따로 약간 외진 곳으로 불렀고 오빠한테 이러저러해서 나 지금 이렇다라고

말했는데 오빠가 갑자기 "내가 말하지 말랬지!" 하면서 나를 죽이는 꿈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호러가 아니라 코미디다. 뭐 이런 개꿈이 다있나 싶지.

그런데 꿈에서 칼에 찔려 죽는 그 순간 헉! 하면서 잠에서 깨서 한참을 침대에 누워서 헉헉 거리며 눈물을 또르륵...

무서워서 한참을 다시 잠에 못 들다가 '오늘은 집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지. 무섭다.' 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잤음.


9. 임신 초기에 지민으로부터 태교하라며 선물 받은 책이 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라는 책이다.

일 관두기 전, 출퇴근 길에 지하철에서도 읽고 집에서도 읽었던 책이었다.

사실 그 때 결혼 준비 하느냐고 급 바빠지면서 까지 다 못읽었다. 그렇게 이사 온 집 책꽂이에 꽂혀있던 책.

문득 그 책이 읽고싶어져서 꺼냈다. 몇 페이지를 읽다보니 '아 맞다. 표현이 참 예뻤었지. 기록하고 싶다.' 라는 생각에

끄적끄적 그림 그리던 노트에 작은 글씨로 마음에 와닿은 예쁜 구절들을 적어나갔다.

어떤 건 한 두줄 짜리도 있었고, 어떤 구절은 대여섯줄을 넘기는 것도 있었다.

나중에 라준이에게도 들려주면 좋겠다 싶을정도로 예쁜 표현들. 어쩜 이리 말도 예쁘게 할까.

옮겨 적고서 빈 공간에는 꽃들을 그려주었다. 어머님 댁 정원에서 봤던 꽃들을 그렸다.

어떤 공간에는 천일홍을, 어떤 공간에는 꽃봉오리를, 다양한 꽃들과 작은 글씨들이 어우러진 게 제법 멋져보였다.

태교를 목적으로 시작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태교를 하고 있더라. 

엎드려서 하는 게 좋은데 배가 불러서 엎드리기가 어렵다.

   

   

   

    

   

   



10.

매일 저녁 오빠가 튼살 크림을 발라줬었는데 어느날에서부터인가 내가 혼자 하고있다.

아마 내가 우울해지기 시작했던 그 즈음으로 추측되는데, 그 동안은 오빠가 발라주었고 나는 거울도 잘 안보며 살았기에

잘 몰랐었는데 내가 거울을 보면서 혼자 튼살 크림을 바르다가 정말 깜짝 놀라 뒤집어질 뻔했다.

배도 많이 나온데다가 팔뚝이며 허벅지며 배, 가슴, 어깨 등등 온몸에 빨간 줄들이 보였다. 

빨간 선이 살이 트는거고, 그게 이제 하얀 선이 되면 마치 지진 난 것처럼 보기 흉하게 자국으로 평생 남는다.

예전에 살 쪘을 때 남은 하얀 자국들이 내게도 있다. 배와 허벅지가 이어지는 팬티라인 쪽에 말이다.

임신 후에 빨갛게 트고있는 피부들을 보면서 진짜 경악했다. 이번에는 기필코 하얀 튼살로 만들지 않으리라.

또 하나 너무 우울했던 건,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었다. 가슴의 둥그런 부분 아래 쪽에 작고 큰 점 같은 것들이 엄청나게 생겼다.

점 뿐만 아니라 작은 선들도 보였는데, 이건 살 트는 것 처럼 빨간 실선이 아니라 꽤 큰 무늬를 하고있다.

가슴 둥근 부분 아래쪽은 양쪽이 다 저렇게 뒤덮였다. 그걸 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이제 진짜 아줌마가 되는구나. 예뻤던 내 가슴까지 이렇게 변하는 구나. 얼룩덜룩 정말 못 봐주겠다.

튼살만 안생기면 되 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크림을 발랐는데 이건 또 뭘까 심란해져서 검색을 해보니

호르몬 때문이라나 뭐라나 하여튼 안 없어지니까 피부과 가서 레이져를 받아야 한댄다. 하.. 

어릴 때에 다른 임산부들을 보면서 임산부는 배가 많이 나와서 정말 힘들겠다 라는 생각 많이 했는데

막상 내가 임신을 하니, 배가 나와서 힘든 것 보다도 이렇게 내 몸의 변화들을 보는 게 더 힘들다.

감정 변화도, 몸의 변화도 정말 모든 것들이 다 너무 힘들다. 인정하기 싫은데 그게 나라서 방법이 없어서.

그냥 견뎌내야하는 시간들이고, 감당해야하는 책임들이라서 무겁고 힘들다.


11.

지난주엔가 결혼 앨범이 나왔다. 원래 결혼 앨범은 3개월 정도 후에나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2달 조금 지나서 받았다.

오 제법 빨리 왔네 라는 생각에 설레며 열어봤다. 그리고 그대로 우울해져서 또 한참을 울었다.

속상한 마음을 어디엔가 쓰고 싶긴 했는데 이런걸 부끄럽게 페북같은데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긴 블로그고, 아는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 그냥 좀 써볼까한다.

결혼식 당일 무척 정신 없었고 하객들이 누가 뭘 입었는지까지 기억할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그런데 앨범 속, 직장 동료 및 친구들 단체 사진 맨 앞줄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반팔로 된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인데 정말이지 하얀색이었다.

사실 앨범 받기 전에도 알고있었다. 핸드폰으로 남들이 찍어준 단체 사진을 보다가 발견했었다.

그 때 정말 엄청난 분노와 우울감에 빠졌었고, 앨범 나오면 정확할거야. 아마 아이보리색 원피스였을거야 라고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달래주었다. 그리고 나온 앨범을 보니 정말 하얀색이더라. 내 드레스랑 색 차이가 없더라고.

오빠도 경악했고 무개념녀라며 내편을 들어줬다. 내편을 들어줬다는 말이 좀 이상하네. 당연히 내 편인건데.

앨범 나오기 전 핸드폰으로 발견하고 한참을 한 며칠을 내내 구렁텅이에 빠졌었다.

설거지 하다가도 열이 받고, 빨래를 널다가도 열이 받고 하루종일을 내 머릿속에 그녀가 떠올랐었다.

그렇게 진짜 내가 얼마나 힘들게 다른 생각들을 하고 다른 일상들을 보내게 된 건데

앨범이 오면서 나는 또 구렁텅이에 빠진 기분이 든다.

앨범이 온 지 일주일 쯤이 되었는데 나는 그림을 그리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밥을 하다가도 그녀 생각이 난다.

결혼식날 내가 좀 더 정신차리고 하얀 옷 입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싶었다.

그럼 한마디 해줬을텐데, 하다못해 단체사진에 맨 앞줄에 서지 말라고 한 소리 했을텐데.

이렇게 넋을 놓고 있다가 평생에 딱 하나인 내 결혼 사진에 맨 앞줄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오빠 잘못이 아니다. 오빠의 전여친도 아니라 하고, 연락처도 모르지만 뭐 여튼 단체로 온 사람들 속에 오게 되었다고 하니

오빠 잘못이 아닌 거 안다. 그런데 내가 이 얘기를 누구한테 해. 오빠 말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남들한테 말하기 그러니까. 오빠 잘못이 아니란 거 아니까 오빠한테도 계속 말할 수 없다.

그냥 계속 내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오빤 그 여자가 무개념이다 라고 하는데, 난 무개념이라고 보진 않는다.

왜냐면 본인도 결혼을 하신데다가, 결혼식장 처음 간 건 아닐거고,

신부가 하얀 원피스를 입으니 하객은 하얀 색을 피해주는 게 당연한 예의라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닐테니까 말이다.

의도하고 입었다 라는 생각만이 가득 든다. 그녀는 그 날 무슨 기분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진짜 고민을 많이 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연락하라고 해서 사과를 받아낼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다고해서 하나도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사과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이미 대문짝만하게 큰 내 앨범에는 그녀가 맨 앞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상해버린 기분은 돌아올 생각을 안한다. 앨범이 오고 일주일이 넘었지만 나는 구렁텅이에 빠져있다.

설거지 하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생각이 나버려서 내 생활에 집중이 안 된다.

남들이 보기에는 뭐 이미 그런 걸 이제와서 어떡하냐거나 어쨌든 축하하러 온거고 마음 곱게 쓰라거나

하얀색으로 올패션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원피스라거나 남들도 하얀 블라우스 입지 않느냐고 한다거나

그럴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걸로 며칠씩 생각하며 감정 소모 중인 나를 바보같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말 진심으로 나 역시도 이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을만큼 억울하고 화가 난다.

다 밉다. 결혼식날 정신 차리고 있지 못한 나도, 오빠 손님이니까 오빠의 과거도, 무엇보다 그녀가 너무 밉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게 진짜 못난 일이고 내가 너무 허접 쓰레기 같은데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한 사람 때문에 결혼 후 세달을 내내 괴롭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앨범을 봐도 그 자리의 그녀가 신경쓰이지 않는 날이 올까 싶고,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분을 망치는데는 확실히 성공이다. 

앨범 말고도 CD에 500장에 가까운 사진이 들어있는데 신부대기실도 본식 사진도 다 예쁘고 재미있다.

그 날이 떠올라서 설레기도 하고, 그렇지만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하다.

결혼식을 떠올리면 사진이 떠오르고, 사진을 떠올리면 하얀 원피스의 그녀가 떠오른다.

사람이 불행해지는 건 정말 한 순간인 것 같다. 한번 생각에 빠져버리니 헤어나오기가 쉽지가 않다.

임산부는 좋은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한다는데 나는 세달을 내내 (심지어는 잘 모르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

헤어나고 싶은데 자꾸 머릿속을 장악해버려서 억울함과 분노에 아직도 눈물이 나고 아직도 화딱지가 나서 죽겠다.

더욱이 감정 컨트롤이 잘 안되는 요즘의 나는 정말 최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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